文化財受章活動

명장서가 이병직

남쪽에 있는 불암산으로 이어진 능선을 따라 사방이 트여 상쾌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는 수락산. 그 서쪽 자락에 벽운동천을 끼고 ‘우우당’이라 불리는 한옥 한 채가 있습니다. 그곳은 옛날 조선의 영조 임금 때 영의정을 두 번 지낸, 사도세자의 장인이며 정조 임금의 외할아버지 되는 홍봉한이라는 사람이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홍씨 일가가 한창 위세를 떨칠 때 이곳에는 사람들로 넘쳐났다고 하는데, 과연 그랬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수백 년은 되었을 듯한 고목들과 갖가지 꽃나무들로 둘러싸인 집 안팎의 풍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풍류를 즐기기 위해 찾아오는 문인이나 정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훗날 이곳을 이병직이라는 내시가 별장으로 사용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의 선조가 벽운동천의 명승지를 사들여 지켜오다가 그에게까지 이르른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 후 잠깐 다른 사람의 손을 거쳤다가 지금은 덕성학원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이병직은 시.서.화에 능통할 뿐 아니라 고문헌이나 미술품,골동품 등에 눈이 밝아 귀중한 문화재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진재’라 이름을 붙인 서재에 국보급에 해당하는 책들을 소장하고 있었답니다.
그 책들은 본래 평양에 사는 이인영이라는 사람의 것이었습니다. 그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일본 교수들 틈바구니에서 은연중에 차별을 받아 반일 애국 감정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책을 보관해 두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귀중한 책이 눈에 띄면 돈을 아끼지 않고 수집하였답니다. 그 후 해방은 되었으나 38선 이북이 공산권 치하에 들어가자 책들을 몰래 서울로 옮겨왔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워져 이병직에게 넘겨주고 도움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이병직이 소장하고 있던 책들은 1950년 6월 11일, 남산에 있는 한국고미술협회 회관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열린 순 우리 책 경매전에 출품되어 세간의 관심을 모았습니다. 《삼국유사》《제왕운기》《북정록》 등 귀중한 문헌들이 261종 1574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경매가 끝난 후 2주일 만에 6.25전쟁이 일어나, 새 주인이 책을 찾아가기도 전 고미술회관에 보관해 두었던 책들이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마치 전란 중에 부모형제와 친지들이 우왕좌왕하다가 흩어져 소식을 알 수 없는 것처럼 되고 말았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이병직이 벽운동에서 약방을 열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그 무렵 그에게 약을 지으러 간 적이 있다는 한 할아버지의 말씀을 들어보니, 그는 환자가 찾아오면 꼭 체질을 따져 약을 지어 주었다고 합니다. 아마 사상의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모양입니다.
이병직은 내시 출신입니다. 그가 왜 내시가 되었는지, 또 궁중에서는 어떤 일을 맡아보았는지, 아니면 선조 때부터 대물림을 받은 것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본래 내시는 재예(才藝)와 용모가 뛰어나고 시문이나 경문에 능한 이를 임명하였다고 합니다. 높은 자리에 있는 분을 가까이서 받들며 그들의 지엄한 명령을 밖으로 전달하기도 하고 때로는 말동무도 되어야 했을 터이니, 이왕이면 영민한 사람을 곁에 두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시들에 대한 기록은 쉽게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들 스스로 드러내기를 꺼린 것인지, 아니면 드러내는 것을 누가 금하기라도 한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병직이 서화가로 소개된 적은 있습니다. 이당 김은호 화백이 쓴 《서화 백년》이라는 책을 보면, 그는 사군자와 서예로 널리 이름을 알렸을 뿐 아니라, 직접 동양화를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희미한 사진을 통해 본 그의 모습은 마르고 키가 컸으며,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는 또한 상당한 재력을 갖고 있어 미술계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던 모양입니다. 당시 젊은 화가들이 모여 연구소를 만들 때 운영 자금을 그에게 부탁할 정도였답니다. 그리고 광복 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국전)에 입선한 그는 국전 추천작가,초대작가를 거쳐 심사위원을 지냈으며, 유명 인사와 명서화가들과 폭넓게 교류하여, 그들 사이에서 상당한 대접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토록 명망이 자자하던 그가 잠들어 있는 무덤에는 석물(石物) 하나가 없었습니다. 이제 막 피어난 듯 노란 산수유꽃이 말간 얼굴로 찾아간 이들을 맞아줄 뿐이었습니다. 그나마 돌보아 주는 이가 있는지 봉분은 단정하여 마음이 놓였습니다.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효촌리. 여러 곳에 땅을 갖고 있던 그가 왜 이곳에 묻혀 있을까요? 그 이유는, 이곳이 유명한 내시촌이었으며 지금도 그 후손들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의 무덤 가까이에는 당시 내시로서는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선조 여덟 분의 묘가 모셔져 있었습니다. 세월에 씻겨 희미해진 비문에는 왕조 시대의 유물 같은 높은 벼슬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돌기와가 가지런히 얹힌 한옥이 몇 채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병직의 먼 친척 되는 이가 살고 있다 하여 만나보고 싶었으나, 나서기를 꺼리는 것 같아 그만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양자 되는 이가 어쩌다 이곳을 찾기도 한다는데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어 퍽 아쉬웠습니다.
내시(환관)는 거세를 해야만 될 수 있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장래의 부귀를 바라고 아버지가 아들을 거세하거나 또 스스로 거세하는 자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병직은 왜 내시가 되었을까요? 강원도 홍천 태생인 그가 어떤 연유로, 수락산 벽운동의 명승지를 사들일 만한 재력을 가진 내시의 양자가 되었는지 그 궁금증은 풀지 못했습니다.
거세를 하면 육체적 변화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남성적인 특징이 퇴화하여 수염이 빠지고 목소리도 여성스러워진다고 합니다. 성격도 기복이 심하여 사소한 일에 감격하기도 하고 갑자기 성질을 부리기도 한답니다. 이것은 육체적 결함을 의식하여 항상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들 중에는 정직하고 너그러운 사람도 있지만 물욕이 강하여 재물을 모으는 데만 열중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왕을 가까이 받들면서 알게 된 기밀들을 이용하여 정치세력들과 손잡고 궁중의 공기를 쥐락펴락하는 일도 없지 않았다고 합니다.
내시는 멀리 고대 서아시아와 그리스,로마,인도,이슬람교 국가들에서도 성행했습니다. 일부다처( 一夫多妻)를 인정하는 이슬람교 나라들에서는 후궁을 관리하기 위해 많은 내시들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중국의 환관이 가장 유명합니다. 중국인은 질투심이 많아 남녀 관계의 혐의를 벗어나기 위해 중성인 환관을 쓰게 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나쁜 짓을 일삼아 재앙을 남긴 사람도 많지만, 종이를 발명한 채윤()이나 크게 국위를 떨친 정화( )라는 환관도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고려 공민왕 때 중국의 환관 제도를 들여와 조선 시대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미 신라 시대의 기록에 ‘환수’가 등장하였다고 하니, 그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 않을까요? 특히 고려 때에는 내시직을 이용하여 득세하려는 무리가 많아 그 폐단이 극심하였다고 합니다. 충렬왕비인 제국대장공주가 환관을 그의 친정인 원나라에 보내었는데, 그곳 황실의 총애를 받아 사신으로 본국에 오는 등 영향력을 행사하자 이를 부러워하여 원나라에 들어가 환관이 되고자 하는 이가 많았답니다. 그리하여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 때는 환관의 수가 백여 명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는 종2품의 상선(上善)에서 종9품의 상원(上元)에 이르기까지 관계(關係)를 두어 엄격하게 규제를 했다고 합니다. 큰 폐단을 막기 위해서지요.
이 제도는 갑오경장(1894) 때 폐지되었다고는 하나, 조선이 막을 내릴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이병직이 1896년에 태어나 내시로 살았으며, 지금까지 생존해 있는 이도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아직도 그리 고운 눈길로 보아주지 않는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주저합니다.
그러나 수진재의 주인이며 서화가였던 송은 이병직은 명장서가의 한 사람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수집하고 보관해 오던 장서들이 지금은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지만, 우리 고전(古傳)을 수호해 온 데 대해서는 다시금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옛날 수락산 서쪽 자락에 있는 벽운동 계곡에서 살았다는 이병직. 내시 출신이면서도 시.서.화에 매우 능통했던 이병직. 우리는 그런 그의 행적을 더듬어 작은 글로나마 그를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그도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에, 야산에 수줍게 피어나 온 산을 붉게 물들이는 진달래처럼 화사한 미소를 지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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